어두운 몽환속의 누에
까샤렐은 사실 요즘엔 향수를 구하기도 힘들 정도로 오래된 향수 브랜드지.
루루는 그 중에서도 영미권 80년대를 완전히 휩쓸었던 향기중 하나다.
세월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포뮬라가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들 하던데 최근 루루는 맡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음 ㅎㅎ
까샤렐의 병들은 대체적으로 장난감같거나 7-80년대의 레트로 감성이 어린 키치함이 있다.
자라면서 볼땐 촌스럽게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뉴트로가 유행하고 나니까 또 매력적이게 보이기도 하고 ㅋㅋㅋ 사람 눈이 이렇게 간사해.
약간 호롱불 같지 않나. 마치 작은 손전등같이 생겼다.
까샤렐 루루의 향 노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op: 아니스, 자스민, 카시아, 제비꽃, 미모사, 계피, 자두, 백합, 창포
middle: 타히티 티아레 꽃, 일랑일랑, 헬리오트로프, 오리스 뿌리, 월하향, 오렌지꽃
base: 바닐라, 머스크, 향, 벤조인, 센달우드
이미지: 종교적, 갸륵한,신비로운 + 애처로운,어린/ 자애로운, 지혜로운/섹시한,원숙한
향 성별: 여성적
향 연령: 전연령
향 계절: 봄, 가을
확산력: 높다
지속력: 은은히 오래감
80년대 향수 특유의 엄청나게 많은 향을 조합해서 크고 드라마틱하게!(양 조절 못하면 머리아프게)가 느껴진다.
고딕에 심취한 쁘아종의 자매랄까.
자두와 계피의 향이 달큰하게 스타트를 끊고 꽃냄새가 올라와서 향이 듬쁙 들어간 진한 샴푸같은 냄새가 된다.
샴푸향이 지나면 흙냄새가 나면서 달콤한 꽃들이 엃히고 설켜 오묘하고 무거운 향이 올라오는데,
이 시대 향수가 그렇듯 이런저런 성분의 향이 나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향으로 만들어진 무언가라서 설명하기가 정말 힘들다.
깊고 그윽한, 신비롭고, 섹시한가 싶다가도 순결한 것도 같고, 대담한가 싶다가 여린 것도 같고...
하나로 핀포인트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렸을 때도 사람들이 이 향에 대한 제각기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던 게 기억이 난다.
누구는 10대 소녀라고 하고, 누구는 할머니 향수라고 하고, 누구는 젋은 마녀라고도 하고.
확실히 느껴지는건 신비함이라는 키워드,
또 베이스에 깔린 향을 피우는 냄새와 나무와 벤조인 냄새때문에 나에겐 종교적이고 애절한 이미지를 남기고 간다는 것이다.
일본의 요괴중에 '누에'라는 동물이 있다. 얼굴은 원숭이, 몸은 너구리, 꼬리는 뱀, 사족은 호랑이인 짐승이고 울떄는 소름끼치는 새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전체 요괴를 보지 못하고 얼굴만 보고 원숭이라 여기거나, 꼬리만 보고 뱀으로 여기거나, 울음소리를 듣고 새라 여긴다고 한다.
이 향은 마치 누에같다. 신비롭게 숨겨져있는데 보는 사람이 어디로 고개를 돌리는지에 따라 어찌 보일지 알 수가 없다.
나이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이미지도 확확 바뀐다. 알 수 없는 향.
향수 이미지:'판의 미로'의 오필리아, '초콜릿'의 비앙, '왕좌의 게임'의 올레나 티렐
떠오른 이미지를 일렬로 세워놓고 보니 그런 느낌도 든다. 어떤 신비롭고 기구한 팔자의 여자가 한평생 쓰게되는 향수같다.
여자는 자라고 변화하지만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듯한...
해리포터같은 영화인 척 마케팅했다가 전국의 어린이들이 무서워 울면서 상영관을 뛰쳐나오게 만든 판의 미로의 오필리아가 떠오른다.
희생정신이 있는 순진한 어린아이. 어두운 비밀이 있는 아이.
그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비밀을 길들이는 법을 배워서 떠돌면서 주위에 도움을 주는 초콜릿의 비앙처럼 신비로운 여자로 성장하게 되고,
덕망이 쌓인 말미에는 자신의 힘과 자신의 온 존재를 사용해 가족을 지키는 왕좌의 게임의 올레나같은 지략가로 변하게 되는 한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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