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Matua 마투아/ Black dirt 블랙더트] 땅의 와인, 바다의 와인

나는루아 2021. 5. 24. 14:16

와인 뭘까...

'신의 물방울' 보면 막...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 풍경이 펼쳐지고 씬이 좐- 하고 나타나고 그러던데 말이야.

사실은 루아는 향수로는 그런 상상이 참 쉬운데, 와인으로는 그게 잘 안되더라 하하

하지만 들어보세요, 와인은 먹을 수 있는 것들의 향이니까 제한적이지 않아?

그리고 자극적인 음식들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 미각은 조금 더딘 편이 아닐까 싶다. (까르보 불닭 사랑해♡)

그래서 향이 너무 섬세하거나 풍부한 와인은 마셔도 향도 몇 개 캐치해내지 못하고... 너무 비싼 와인은 루아 입에는 낭비처럼 느껴진다. 몇 가지의 뚜렷한 향을 쉽게 캐치할 수 있는 적당한 가격대의 와인이 루아 팔자가 아닌가 싶다.


그런 루아에게도 와인을 마시자마자 장면이 좐- 펼쳐지는 그런 만화 같은 경험이 한번 있었다. 대단한 와인도 아니고 매주 저가 와인을 한두 병 사마시는 취미가 생겼을 때 마셨던 화이트 와인인데 정말 뭐가 있는 걸까...(심지어 코르크도 아니고 스크류 탑이었다고!)

마시자마자 어릴 적에 가곤 했던 테두리에 잔디가 깔린 바닷가들이 떠올랐다. 단단한 자갈과 바닷물의 미네랄 감과 잔디 냄새, 기억 속의 공간의 맛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뚜렷하게 났다.

친구네 어머니께서 바닷가에 데려가 주시면서 차 뒷좌석에서 친구와 먹었던 패션푸르트 향이 기었났다. 셨지만 엄청 향기롭던 패션푸르트.

달지 않고 아주 살짝 짭짤한 맛이 드는 옅은 연두색 수색도 얕은 바닷물이 해를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제야 보틀을 자세히 읽어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진짜 어릴 때 자랐던 곳에서 만들어진 와인이었던 것이다. 돌아가 보지 못한지 15년이 넘어가는데.

마투아라는 뉴질랜드 와인이다. 소비뇽 블랑.

마투아는 마오리어로 '가장'이라는 뜻.

소비뇽 블랑이 가장 인기상품이고, 피노 누아, 로제도 있다는데

루아는 소비뇽만 먹어봤다. 소비뇽 블랑이 이렇게 맛있는데 굳이 다른 바리에이션을 먹어봐야 할...?<ㅋㅋㅋㅋㅋ

처음 마셨을 때는 저렴하게 15불 정도로 저렴했었는데

한국에서는 찾기도 힘들고 가격도 3만 원 이상..

그래도 발견하게 되면 조건반사적으로 사버리게 된다.

와인을 마시면서 이런 구체적인 경험은 딱 한 번이었고 게다가 떠오른 배경이 와인 출처지와 같은 곳이었다니, 너무 신기하고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와인이다.


처음 이 와인을 마셔봤을 때는 흥분해서 주위 친구들 모두에게 이 와인을 맛보이려고ㅋㅋㅋ 했었닼ㅋㅋㅋ

그냥 화이트 와인인데..? 하는 친구들도 있긴 했지만, 이 와인 덕분에 재밌는 일도 있었다.

친구 그룹 중에 같은 동네에서 자란 소꿉친구들이 있었는데, 다 같이 먹고 싶은 와인이 있다고 하자 그쪽 두 사람도 신이 나서 자기들도 소개해주고 싶은 와인이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친구 집에 모여서 작게 시음회를 열게 되었다.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한테는 시 속에 나오는 이상적인 바닷물 같은 맛이야.'

마투아에 대한 내 설명에 친구들이 눈빛을 교환하며 웃어댔다.

'우리 와인을 보면 너도 웃을걸.'

하고 말하며 친구들이 자기들이 준비한 와인을 보여줬다.

'우리가 좋아하는 와인은 '땅 와인'이거든.'

블랙 더트 레드.

정말 신기하고 재밌던 건, 이 와인 역시 '대단한 와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음식에 곁들이는 용도의 테이블 와인이었고, 우리가 앉아있는 친구네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만들어진 와인이었다. 그러니까, 이 와인도 친구들이 자란 곳 근방에서 만들어진 와인이었다.

사람들에겐 고향으로 끌어당겨 지는 육감 같은 게 있는 걸까?

'엄청 특별한 와인은 아니지만, 마시기 편하고 스무스해. 우린 좋아해.'

친구 중 하나가 따라주며 말했다.

아주 기름지고 달콤한 흙이 떠오르는 편안한 맛이었다. 테이블 와인 치고는 약간 달콤한 느낌으로, 베리류의 단맛과 흙 향기가 어우러졌고 탄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부드럽게 술술 넘어갔다. 기름진 흙에 맨발로 서 있을 때의 촉촉함 같은 게 연상되었다.

초콜렛 케이크가 당기는 맛이라고 했더니 친구들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다 같이 와인을 나눠 마셨던 것은 나에겐 정말 각별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미각과 후각으로 서로의 어린 시절의 행복하고 좋은 부분을 떼어내어 나눠 먹은 것만 같은 경험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블랙 더트를 좋아하는 이유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나도 블랙 더트가 참 좋다.

이제 나는 블랙 더트를 생각하면

생활감이 느껴지는 어수선한 친구의 본가,

바닥과 소파 여기저기 모여앉아 와인을 마시며 디즈니 만화를 보는 친구들의 얼굴,

노란 저녁 조명과 무릎에 고개를 내려놓고 올려다보는 커다란 친구 부모님네 개가 떠오른다.

비단 와인뿐만이 아니라 비싼 것들은 분명 비싼 가치를 하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개개인에게 추억으로 다가오는 것들은 역시 가치를 먹이기 참 어렵다.